감자를 다루는 것의 차이가 역사를 바꾸었다.-감자의 역사

[2024-07-08   00:07]

감자의 역사

오랜 시간 여러 논란 끝에 페루 남부에 위치한 안데스 산맥의 고산지대가 원산지라고 확인된 감자는 남아메리카의 최대 규모이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로 알려진 티티카카호 주변의 분지에서 기원전부터 재배되었다고 알려졌다. BC1만 년경부터 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감자는 남아메리카의 문명국가로 알려진 ‘잉카’라는 제국에 번영을 가져다준 작물이었다. 잉카는 피사로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현재의 페루를 중심으로 볼리비아와 칠레,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태평양 연안을 마주한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제국이었다. 이런 잉카의 사회적인 안정에 기여하고 힘이 되었던 먹거리 감자가 유럽으로 전해진다.

포르투갈과 함께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이었던 에스파냐는 콜럼버스의 개척을 통해 옥수수를 받아들였고 피사로를 보내 잉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잉카인들이 주식으로 사용하던 먹거리 감자를 받아들였다. 감자는 유럽에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을까? 옥수수도 그렇지만 처음부터 유럽에 감자를 전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항해를 해야 하는 선원들의 배를 채워줄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배에 실려 선원들에게 제공되다가 유럽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우연하게도 감자에는 비타민C가 많다. 당시 신항로를 개척하면서 장시간 바다에 있게 되었다. 이때 선원에게는 흔하게 발생하던 질병이 비타민C의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이었다. 괴혈병에 걸린 선원이 감자를 먹으면 증상이 완화되거나 치료되었다. 당시의 선원 모두가 이런 내용까지는 정확히 몰랐겠으나 어찌 되었든 충분한 양의 감자가 에스파냐를 향해 출발하는 배에 실렸다. 감자가 배에 실린 것은 선원들의 괴혈병을 치료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 끼니때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더 크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선원들의 허기를 채웠던 감자는 에스파냐에 도착한 뒤에도 꽤 남아 있었다. 이때 남은 감자가 버려지지 않고 유럽에 전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약탈한 금은보화와 함께 배에 실렸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감자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자원으로서 감자의 가치가 부각되면서 같은 배에 탔던 약탈한 금은보화보다 가치가 커졌다. 에스파냐로 16세기 중반(1540년)에 전해진 감자는 이후에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대륙의 다양한 나라로 전파되었다. 바다 건너인 잉글랜드에는 16세기 말에 감자가 전파되었고 잉글랜드의 식민지였던 지금의 USA에는 17세기 초에 잉글랜드에서 버뮤다를 거쳐 전파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아일랜드에까지 전해지면서 전 유럽에 감자의 가치와 존재성을 알렸다. 감자의 도입은 훗날 유럽이 겪게 되는 정치/경제/사회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데 큰 영향을 주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감자가 유럽의 곳곳으로 전파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 이유는 감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냐를 시작으로 각 지역으로 퍼져나간 감자는 단순한 농업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모습을 만들어 낸 중요한 흐름의 시작이 된다. 그런 위력을 몰랐던 에스파냐는 구교(가톨릭)를 믿는 나라다 보니 땅속에서 자라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자를 ‘악마의 식물’이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감자를 먹으려고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단체급식이 필요한 곳에서만 식사로 공급되었었는데 에스파냐에 들어온 감자는 세비야병원의 입원환자에게 급식으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또 하층민이나 노예가 먹는 작물로 취급하면서 동물의 사료로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이 감자를 멀리했다. 이후 재배가 잘 이뤄지지 않다가 18세기에 들어서 기상재해로 흉년이 계속 찾아오면서 밀이라는 먹거리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감자재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만 찾는 이는 많지 않아 재배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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