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1 00:23]
-감자로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다.
유럽에서 감자가 푸대접받는 상황에서 판을 뒤흔들 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유럽 역사에서 오늘날 ‘대왕’또는 ‘대제’라는 칭호로 불리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다. 그는 프로이센이라는 나라를 유럽의 그저 그런 나라 중에 하나가 아닌 근‧현대사에서 부국(富國)과 강병을 이룩한 신흥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이때 다져진 국력을 성장시켜 훗날 이름을 드높인 것은 물론 세계 제1, 2차 대전에까지 영향을 주는 나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프로이센의 세 번째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다. 많은 이가 프로이센의 부국강병은 슐레지엔 덕분이었다고 말을 하나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한 ‘감자’였다.
계몽 군주로 알려진 그는 부왕으로부터 잘 훈련된 8만의 상비군과 많은 경험으로 단련된 관료들을 이어받았다.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 때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에게 군대를 빌려준 공을 인정받아 프로이센은 왕국이 되었으나 유럽의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공국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존재감이 약했던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납과 석탄 철 등이 풍부한 슐레지엔 지역을 확보하게 되는 8년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년~1748년)’과 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소유권 갈등으로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와 잉글랜드-프로이센의 구도로 진행된 ‘7년 전쟁(1756년~1763년)’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운(運)의 도움과 지략을 발휘해 연달아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을 신흥강대국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듯이 영광스러운 승리에 가려진 프로이센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졌다는 사실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백성들의 굶주림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나 1774년에 닥친 흉년까지 겪으면서 백성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성장 속도도 빨라서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감자를 심어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으나 백성들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콜베르크 지방의 백성들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가축조차 먹지 않으려는 걸 왜 우리에게 먹이려고 하냐?’는 호소를 들어야 했다. 감자는 이미 1647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인 바이에른에서 처음 재배가 되었었고 1650년대에 이르러서는 프리드리히 2세의 증조부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브란덴부르크에서도 재배했었기 때문에 감자를 재배하는 데 있어 가능 여부는 논의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문제는 앞서 언급한 내용처럼 백성이 가졌던 감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었고 이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포메른에 기근이 닥쳤던 1746년에 이를 타개하려고 처음으로 ‘감자령(Kartoffelerlass)’을 제정하였다. ‘사탄의 작물’이라는 인식을 무마시키기 위해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감자를 재배하는 방법을 일반백성에게 알려주며 독려하도록 했지만 백성의 호응이 적어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감자재배를 독려하려고 나섰지만 감자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프리드리히 2세는 꾀를 냈다. 감자를 심은 자리에 병사를 시켜 지키도록 했다. 동시에 백성들이 접근을 하더라도 못본체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리고 ‘감자는 왕과 귀족만 먹어야한다.’고 지시했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경계가 삼엄하자 ‘먹지 못하는 감자를 지키다니?’라며 의아해하면서도 궁금해했다.
동시에 감자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이들도 감자를 왕과 귀족만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감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 감자를 수확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경계가 느슨해지는 밤에 백성들은 몰래 감자가 심어진 곳으로 가서 감자를 캐다가 자신들이 가진 텃밭에 몰래 심었다. 이후 소식은 말보다 더 빠른 속도로 프로이센 전 지역에 퍼졌다. 그리고 감자를 재배하는 지역도 늘었다. 결국 감자는 프로이센 덕분에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그 역할이 부각되며 홀대받던 식자재에서 한 나라의 보편적인 식량의 지위로 올라서며 프로이센인들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된다. 또 프로이센의 동맹국이었던 잉글랜드에도 영향을 주어 잉글랜드의 서부에서도 감자라는 농작물은 부족한 먹거리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바다 건너 척박한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의 재배가 더욱 확대되어 경제가 좌우될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프로이센의 백성들이 감자로 굶주림을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평소 국왕의 신분이었던 자신을 나라의 첫 번째 종(premier domestique)이라고 말하며 전제군주였음에도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았던 군주였다. 그래서 감자를 보급함에있어서도 이런 봉사정신을 발휘하기로 했다. 솔선수범하여 감자를 재배하여 먹었다. 그리고 귀족들이 먹도록 했으며 군대와 백성이 먹도록 하였다. 백성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감자로 먹을 것이 해결되자 상비군을 유지하는데에 들어가는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상비군의 규모도 대폭 늘어 22만에 육박하였다. 프로이센은 어느새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하게 된다. 물론 무상으로 초등교육을 하는 것과 슐레지엔의 확보 등 여러이유가 같이 작용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와 러시아,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가졌던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굶주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감자의 역할이 크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자주 거주하던 상수시(Sanssouci, 걱정없는)궁전의 이름답게 감자의 영향력으로 오랜시간 고민했던 백성들의 먹거리를 해결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프리드리히 2세는 후세들에게 별칭을 얻게 되는데 바로 ‘감자 대왕(Der Kartoffelkönig)’이다. 지금도 포츠담에 있는 그의 무덤에 놓인 감자가 그의 인기를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