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3 01:45]
경제적인 욕심이라는 씨앗이 만들어낸 전쟁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은 한 달 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유럽의 주요 강대국은 물론 그들의 식민지가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대서양 건너의 남북아메리카까지 전 세계가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된다. 각종 신무기가 동원되었으나 참호전이라는 지루한 양상으로 이어지다 보니 승부가 나지 않아 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던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세계의 구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군주제가 무너졌다. 패전국이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하며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했었던 프로이센의 후예인 도이치도 베르사유 조약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떠안게 되어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사분오열되어 거의 해체되었다. 그나마 튀르키예의 독립전쟁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머지 오스만의 영토는 승전국이던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흡수하였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동과 북아프리카지역에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국경선이 직선으로 그어졌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런 전쟁은 왜 발생한 것일까? 겉보기에는 민족주의와 같은 감성적인 부분의 충돌로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다. 다른 상대국보다 산업적으로 뒤져있던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된 제품은 서유럽의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가 쉽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프랑스 같은 서유럽국가들은 통일된 국가를 유지하면서 재정을 포함한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어 정치적인 안정을 유지했고 이를 기반으로 일찌감치 바다로 나아가 식민지를 건설했다. 식민지에서 저렴하게 원료를 들여와 본토에서 가공생산된 제품을 식민지에 팔아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형식만 갖춘 채 관료제와 상비군 없는 불안정한 통합을 유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은 국가라는 개념이 적다 보니 황제마저도 군주라는 개념보다는 대표성만을 띄는 존재였다. 오히려 지역의 영주는 군주가 되어 주변을 통합하면서 더 강력한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었고 실질적인 통치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쪽에서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도이치가 성립이 되고 남쪽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하면서 근대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춘 통합을 이루었다. 이런 늦음을 사회학자로 알려진 헬무트 플레스너(Helmuth Plessner)는 ‘뒤늦은 민족(verspätete nation)’이라고 표현했다. 통합이 늦어진 두 지역은 식민지건설에도 뒤늦게 뛰어들어 잉글랜드와 프랑스, 에스파냐처럼 대규모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게 쉽지 않았다. 주요 요충지는 이미 다른 나라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도이치는 늦게나마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에스파냐 등이 진출하지 않은 곳을 찾아 겨우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으나 투자한 비용 대비 현지에서 얻는 이익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다 보니 본국에서 제품을 생산해도 판로가 쉽지 않아 경제적인 불만이 쌓여만 갔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의 이중제국(二重帝國, Dual Empire)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해 유럽 내의 여러 지역을 합병해서 내수시장을 확대하였다. 해외보다는 유럽 내에서 다른 나라와 지역을 합병하려다 보니 경제적인 이권을 더 가지기 위한 경쟁에서 다른 나라에 뒤처지는 상황은 유지되었고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빈곤층의 몫이었다. 특정 지역의 발전이 더디면서 해당 지역의 민족은 불만이 점점 커졌다. 이로 인한 불만은 갈등을 만들었다. 특히 세르비아계 민족이 많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합병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같은 언어를 사용했으나 구성원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민족 구성으로 인해 언제든지 봉기가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두 나라는 각자의 방식대로 소비시장을 키워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버틸 수는 있었다.
주변 나라의 견제를 막으려고 식민지 건설에 소극적으로 임했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30세가 되지 않은 젊은 혈기의 도이치 황제 빌헬름 2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러시아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결국 이런 경제적인 불만과 갈등은 정치적인 행동을 낳았다. 이런 상황이 반영된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은 결국 민족적인 갈등을 포함한 감정싸움으로 번져 전쟁으로 확대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된 것이다.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부를 이루려는 욕구로 인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려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과도한 전쟁배상금 청구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포함한 승전국이 도이치에 요구한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인해 도이치는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에 대해 굴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런 감정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면서 나치즘이라는 극단적인 새로운 정치이념을 만들어내어 또 한 번의 세계 대전이 일이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잘못된 결말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부르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