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5 23:29]
동학농민군을 기리는 술이 일본 스타일?
옛 한성 땅에는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두었다. 그 중앙에는 누각 형태의 집을 종을 두었고 사방팔방에 때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누각에 있던 종의 집을 우리는 종각이라고 한다. 종각역 5번 출구와 6번 출구 사이에 있는 영풍문고 건물 앞에는 누런빛을 발산하는 동상이 있다. 날렵한 시선을 가진 동상의 주인공은 녹두장군으로 알려진 전봉준이다. 5척 단신(약 152cm)으로 어려서부터 듣던 별명이 나중까지 이어져 동학농민군을 이끌 때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그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아버지를 잃었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들면서 폭압이 계속되자 1894년 1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열어 곡식을 민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놀란 조정에서는 조병갑 처벌을 약속했고 이에 농민들은 무장을 풀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새로 부임한 관리의 횡포는 계속되었다. 이에 전봉준은 자신이 접주로 있던 동학과 농민들을 규합해 1만의 농민군을 구성하고 전라도를 관할하는 전라 감영이 있던 전주로 진격했다. 위세에 놀란 관군은 전주성을 비우게 된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위기감을 느낀 조정이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때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며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명분을 없애기 위해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으면서 농민군을 해산시켰으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왕이 인질이 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농민군을 모으기로 하고 삼례로 가게 된다. 이때 모인 농민군이 4천 명이었다. 한성으로 북진하던 농민군에 참여하겠다는 이들이 늘어 1만 명에 이르더니 어느새 2만이 넘었다. 더 이상의 북진을 막기 위해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과 마주친 곳은 공주 일대였다.
공주 일대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이어졌으나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연전 연패를 당하며 동학농민군은 계속 수가 줄어 결국 와해 된다. 나중을 기약하고자 전봉준은 남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 피노리로 피신했다가 옛 부하의 밀고로 붙잡힌다. 재판을 위해 한성으로 압송해야 했음에도 일본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여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기력을 잃었다. 이때 그가 기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구급약으로 사용되던 ‘죽력고’라는 술이었다.
푸른 대나무를 잘게 쪼갠 뒤에 불에 구우면 나오는 죽력이라는 진액과 생강즙, 꿀을 소주에 넣어 만드는 약술을 ‘죽력고’라고 부른다. 죽력고 덕분에 기력을 차린 전봉준은 들것에 실려 한성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고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전봉준은 자신의 기력을 회복시켜준 죽력고를 당당하게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진실 여부를 떠나 그는 죽력고 한 술 크게 마시고 나라에 대한 근심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와 함께 나라를 위해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을 모시는 구민사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동학농민군을 기리는 제사에 일본의 제법으로 만든 일본식 청주를 사용한다는 거다. 조선식 청주는 도정하지 않은 쌀로 술을 빚어 사용한다. 동학농민군의 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들을 기리는 제사에 기력을 살리기 위해 죽력고를 올릴 수도 있고 농민이 즐겨마시던 농주(탁주, 막걸리)를 올려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생전 맛보지 못한 비싼 청주를 맛보게 하려는 행사 관계자들의 의지는 알겠으나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난 동기를 안다면 최소한 조선식 청주를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행정부 수반이 일본에 가서 비루를 마시고 우리나라에 온 기시다에게 일본식 청주를 따라주었다고 우리까지 정신줄 놓고 동학농민군에게 일본식 청주를 올리면 안 되는 게 후손으로서의 도리이자 예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