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②-술이 아니라 식초다.

[2024-07-25   23:35]

 

영조②-술이 아니라 식초다.

 

1392년 조선의 개국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금주령이 계속 이어졌다. 조선 전기인 태종, 성종, 연산군, 중종, 명종은 물론 후기인 인조, 현종의 통치 기간에도 흉년이 들 때마다 금주령이 내려졌었다.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금주령’하면 떠오르는 왕이 즉위한다. 바로 영조다.

영조의 통치가 이루어진 52년이라는 기간 거의 금주령이 내려졌었다. 특히 가뭄과 홍수로 발생한 흉년 때마다 금주령을 내렸으나 그 와중에도 아파서 약으로 마시는 술은 허락했다. 동시에 백성이 농사지으며 마시는 농주와 병사들이 훈련 후에 하는 회식인 호궤에서 마시는 술은 예외로 했다. 힘없는 백성의 힘들고 고된 삶에 대해 영조가 나름 배려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외에 금주령이 내려졌던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백성에 대한 배려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유세교’라는 백성을 통해서다. 실록에 담긴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가장 강력했던 금주령으로 알려진 1756년에 내려진 금주령을 이어가던 1757년 11월 19일 오후 2~3시경 홍화문으로 갔다. 금주령을 어겼다는 혐의를 받고 잡혀 온 백성 중에는 밀주를 만들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알려진 혐의를 받던 유세교라는 백성이 있었다. 영조는 유세교를 효시해서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이때 유세교는 자신이 만든 것은 술이 아니라 식초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조는 술이 들어있는 그릇을 모여 있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모두가 술이라고 했다. 재차 확인하기 위해 형조의 여러 하급 관리에게 그릇에 담긴 게 술인지 식초인지를 살피라고 지시했다. 모두가 술이라고 하자 삼정승 중에 하나인 좌의정 김상로가 ‘처음에는 술 같았는데 종이에 적셔 냄새를 맡아보니 식초 같다.’고 답을 한다. 이에 영조는 다른 신하에게 그릇에 들어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해서 직접 맛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맛을 보니 식초가 맞다.’며 술이라고 말했던 형조의 관리 몇을 파직시킨다. 여기까지가 밀주를 빚어 팔다가 잡혀 온 유세교와 관련되어 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세교의 주장을 편들어주었던 영조였으나 그의 무죄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바로 풀어주지는 않았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유세교에게 곤장을 치도록 하고 풀어준 것으로 나온다. 그러자 좌의정이 ‘식초라고 말씀했으면서 왜 장을 때리냐?’고 물었고 영조는 ‘군자가 있고 나서야 소인을 알 수 있고 술이 있고 나서야 식초를 알 수 있다.’는 표현을 남긴다. 즉, ‘다른 밀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맛이 강해서 식초라고 했을 뿐 내가 맛을 보니 술이 맞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술과 식초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술은 곡식을 효소제인 누룩으로 당화(糖化)시켜서 만들어진 당을 효모에게 먹여 알코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식초는 알코올을 먹이로 하는 초산균에게 알코올을 먹여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결국 술을 만들어야 식초를 만들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식초가 되기 전 알코올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젖산균이 효모보다 활동을 좀 더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젖산균이 젖산을 생산해서 술에서 신맛이 강해질 수도 있다. 술 좀 마셔본 영조는 이런 걸 알고서 유세교의 목숨을 거두지 않고 살려주는 대신 ‘곤장을 때려서 벌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영조는 조선에서 평소 권세를 누리는 사대부와 관리에게는 가혹하리만큼 금주령을 지키도록 강요했고 처벌에 대해서도 냉정했으나 힘없는 백성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배려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필자가 볼 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조 자신 스스로도 그릇에 담겼던 것이 식초가 아닌 술이라고 인정을 했으면서 술을 술이라고 했던 형조의 하급 관리를 ‘굳이 파직시켰을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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