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1)왕위계승이 불러온 갈등

[2024-06-14 10:35]

 

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1

 

왕위계승이 불러온 갈등

프랑스 왕 샤를 4세의 죽음(1328년 2월 1일)은 여느 왕의 죽음과는 달리 유럽에 회오리를 몰고 왔다. 변방의 잉글랜드와 유럽을 대표하는 문화 강국으로 알려진 프랑스 간의 전쟁이 116년간 이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프랑스는 아들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살리카 법이 적용되었던 나라였다. 이로 인해 샤를 4세(향년 33세)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사망하자 귀족들의 모든 관심은 임신 중이던 왕비(에브뢰의 잔)에게 집중되었다. 아들이 태어날 때는 프랑스를 이어갈 왕이 되는 것이었으나 딸이 태어나면 새로운 왕을 선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만약을 대비해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따져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자 샤를 4세를 중심으로 하는 가계도를 살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를 세 명의 후보가 추려졌다.

샤를 4세와 사촌 관계인 필리프 드 발루아(훗날 필리프 6세)와 또 다른 사촌(샤를 4세의 처남이면서 조카사위)이면서 루이 10세의 딸 잔(또는 조안)과 부부였던 필리프(훗날 나바라의 왕 필리페 3세), 그리고 샤를 4세의 조카로 삼촌 관계였었던 에드워드 3세(잉글랜드 왕)였다. 왕비의 출산을 기다리던 시기에 세 명의 후보 중에서 왕이 되기 위해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였다. 필리프는 파리태생이면서도 아버지인 샤를 발루아 백작의 정치적인 영향력 덕분에 어려서부터 왕실과 가까이 지냈으며 명문가를 이어갈 자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여기서 잠깐 필리프의 아버지인 샤를 백작에 대해 알아보자.

넓은 영지를 통해 충분한 재력도 가졌던 샤를 백작은 프랑스 왕이었던 필리프 4세의 동생으로 형을 보필해 프랑스의 정치와 행정에 관여했던 것은 물론 세 명의 조카들이 연이어 왕위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프랑스 왕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을 보좌하며 막후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샤를 4세의 재위 기간인 1325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30대 초반의 필리프(1293년생)가 샤를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아 발루아 가문을 이끌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던 필리프가 파리에 있는 여러 귀족과 관계성과 친밀도에서 훨씬 유리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필리프가 작위를 이어받은 지 3년 뒤 샤를 4세가 사망한다. 30대 중반이 된 필리프 백작에게 야망을 꿈꿀 기회가 찾아온 거다.

당시의 프랑스가 이런 환경에서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필리프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왕실과 가까운 주변의 친인척 귀족의 지지를 끌어내야 했다. 먼저 영향력 있는 귀족들에게 접근해 임시로 국왕의 역할을 할 섭정을 뽑을 때 자신이 맡아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며 설득하였다. 섭정이 되면 샤를 4세의 왕비가 아들을 낳아 왕이 되더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막후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왕비가 출산을 했다. 프랑스의 관심이 집중된 순간 태어난 아이는 딸(1328년 4월 1일)이었다. 필리프는 그때부터 한 단계 더 큰 그림을 그렸다. 바로 프랑스의 왕이었다. 공주가 태어난 이후, 그의 머릿속 계산은 이제 프랑스 왕위만을 위해 움직였다.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알기에 빠른 매듭을 짓고자 더욱 발 빠르게 귀족들을 만나 지지를 당부했다.

필리프는 서둘러(5월 29일) ‘랭스대성당’에서 도유식(기름부음)과 대관식(왕관예식)을 치렀다. 공식적인 호칭이 발루아 가문의 백작 필리프에서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6세가 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승계와 같은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명분보다도 우선인 게 먼저 자리를 차지하거나 세력을 모아야 한다는 거다. 프랑스 왕위계승의 정당성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인물은 샤를 4세의 남매였던 이사벨 공주와 에드워드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3세였다. 누가 보더라도 정당성 면에서는 그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거리적인 문제와 에드워드 3세를 지지해줄 정치적인 기반이 약했다. 더불어 당시만 해도 변방이었던 잉글랜드 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왕위계승은 유럽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환경에서 필리프는 자신의 아버지부터 왕실과 이어져 온 발루아 가문의 영향력의 크기를 알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발루아 가문의 수장이라는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다 보니 모든 면에서 중앙정계에서 귀족의 지지와 호응을 얻기 위해 유리했다. 더불어 필리프 6세의 정치적인 감각이나 상황조성 능력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필리프 6세가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프랑스의 왕위를 차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또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던 프랑스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잉글랜드라는 변방의 왕을 유럽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프랑스인의 자존심은 오늘날에도 유난스러우나 당시에는 더했을 것이다. 설사 공정성을 위해 그의 왕위 계승 자격을 인정하더라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귀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바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귀족의 지지를 얻는 게 사실상 어려웠다. 당시의 교통수단을 감안했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스코틀랜드와의 갈등을 포함한 잉글랜드의 국정운영도 중요했기에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프랑스 왕위계승과 관련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잉글랜드에서 어머니인 이사벨과 함께 바다 건너에 있는 필리프 6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필리프 6세의 즉위는 프랑스에서 발루아 왕조라는 새로운 왕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동군(同君)연합을 이루려 했던 꿈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눈앞까지 와 있었던 프랑스 왕위를 놓친 것에 화가 났으나 에드워드 3세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신분이 잉글랜드의 왕이면서도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봉토를 잃지 않으려면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6세에게 충성서약을 해야만 했다. 충성서약을 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의 자존심 꺾기가 쉽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는 우여곡절 끝에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의 충성서약을 받아들이며 프랑스의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다졌다. 결국 충성서약을 통해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왕위 계승과정에서 보였던 갈등까지 봉합된 것은 아니었기에 언제든 다시 두 나라의 갈등이 재현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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