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2)정당성보다는 정치력

[2023-06-16 23:25]

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2

정당성보다는 정치력

정치든 경제든 명분보다도 먼저 차지하거나 세력을 모아야 한다는 거다. 프랑스 왕위계승의 정당성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인물은 샤를 4세의 남매였던 이사벨 공주와 에드워드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3세였다. 정당성에서는 그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3세를 지지해줄 정치적인 기반도 약했다. 더불어 당시만 해도 변방이었던 잉글랜드 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왕위계승은 유럽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인의 자존심은 유달리 강하다고 알려졌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잉글랜드라는 변방의 왕을 유럽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수치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필리프는 자신의 아버지 때부터 왕실과 이어져 온 발루아 가문의 영향력의 크기를 알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발루아 가문의 수장이라는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다 보니 모든 면에서 중앙정계에서 귀족의 지지와 호응을 얻는데 유리했다. 더불어 필리프 6세의 정치적인 감각이나 상황조성 능력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필리프 6세가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프랑스의 왕위를 차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설사 공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의 왕위계승 후보 자격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프랑스 귀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런던에서 파리로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당시의 교통수단을 감안했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스코틀랜드와의 갈등을 포함한 잉글랜드의 국정운영도 중요했기에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프랑스 왕위계승과 관련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잉글랜드에서 어머니인 이사벨과 함께 바다 건너에 있는 필리프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해 필리프 6세로 불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필리프 6세의 즉위는 프랑스에서 발루아 왕조라는 새로운 왕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동군(同君)연합을 이루려 했던 꿈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눈앞까지 와 있었던 프랑스 왕위를 놓친 것에 화가 났으나 에드워드 3세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신분이 잉글랜드의 왕이면서도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봉토를 잃지 않으려면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6세에게 충성서약을 해야만 했다. 사춘기인 에드워드 3세의 자존심 꺾기가 어려웠기에 충성서약을 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1329년 9월에 1차 충성서약이 있었으나 의식 도중 손을 잡는 걸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에 필리프 6세는 1330년 7월까지 충성서약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키텐의 봉토를 몰수하겠다는 경고를 남긴다. 1330년 10월에 친위쿠데타를 성공한 에드워드 3세는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고 봉토를 회복해야 했다. 1차 충성서약에서 분노한 필리프 6세를 잠재우기 위해 제대로 된 충성서약을 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했다. 이에 1331년 4월에 파리에서 에드워드 3세를 만난 필리프 6세는 충성서약을 받아들이며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자혜로움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필리프 6세는 프랑스의 모든 봉신에게 충성을 서약받게 되었고 프랑스 국왕으로서 명실상부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옥신각신하는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인 충성서약을 통해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를 다시 봉토로 확보할 수 있었고 필리프 6세는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감정 다툼이 잠시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왕위 계승과정에서 보였던 갈등까지 봉합된 것은 아니었기에 언제든 다시 두 나라의 갈등이 재현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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