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6
–결국은 돈
앞서 언급한 대로 잉글랜드는 반란이 일어난 플랑드르에게 양모 수출금지에서 제외해 줄 테니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필요한 지원을 요청했다. 전쟁을 하려면 병력이 움직여야 하다 보니 먹이고 재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백년전쟁 개전 당시 잉글랜드는 여러 차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면서 비용을 많이 사용해 이미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잉글랜드가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세금을 걷어야 했다. 이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반대가 심했다. 프랑스에서도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를 처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느라 잉글랜드에게 실질적인 공격을 못했다고 평가를 하고 있으나 사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이 문제였다. 병력모집을 위해 소집령을 내리는 거까지는 가능했으나 모인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전쟁 초기에 두 나라의 본격적인 힘겨루기보다는 경제적인 제재, 보복과 더불어 신경전과 첩보전만 계속되었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플랑드르에서 발생한 반란과 상공인들의 지원 약속이 있자 에드워드 3세의 자세는 달라졌다. 플랑드르의 금전적 지원에 자신감을 얻은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실전경험이 뛰어났던 잉글랜드군을 프랑스에 상륙시킨 것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애초에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자료에 따라 조금씩 추정이 다르지만 개전 당시의 프랑스 인구는 약 2,000만~2,500만 명이었다고 알려졌고 잉글랜드는 약 500만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시에 국력도 잉글랜드는 당시만 해도 대륙과 떨어져 있는 섬나라 정도로 취급되며 변방이었고 물자도 적어 전쟁 지속 능력이 높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다. 전체 국토의 70%가 평야와 낮은 구릉으로 되어 있어 농업 생산능력이 뛰어나 전쟁 지속능력이 높았다고 평가를 받는다. 이런 두 나라의 싸움이다 보니 주변의 모든 나라가 프랑스의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실전 경험이었다. 스코틀랜드에게 자주 패하기는 했지만 웨일즈를 점령하고 스코틀랜드와의 꾸준한(?) 전투를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3세와 함께 가 프랑스에 상륙한 잉글랜드의 병력은 1만 명이 안되는 약 9,000명 선이었지만 전투력은 오합지졸 3~4만보다 나았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과의 전면전을 치르기보다는 프랑스에 상륙해서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잉글랜드가 전면전을 치르지 않은 이유는 프랑스에 비해 병력이 적었던 것도 있지만 프랑스인들에게 필리프 6세가 신민(臣民)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이런 의도가 작용해서인지 전쟁 초기에는 필리프 6세에 대한 반감이 많았다.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의도적으로 파괴했다. 프랑스는 이내 혼란이 찾아왔고 필리프 6세에게 곤욕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잉글랜드 군은 교회와 수도원의 성직자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민심을 이반시켜 필리프 6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신뢰에 금을 내기 위해서였다. 신분이 낮아보이면 학살했고 신분이 높아보이거나 성직자는 높은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동시에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약탈을 통해 얻은 프랑스의 온갖 재화는 잉글랜드로 유입되었다. 백여 년이라는 전쟁 동안 큰 전투는 4~5차례 정도 치러지지만 잉글랜드는 이런 형태의 납치와 약탈을 이어가며 프랑스를 괴롭혔다.
두 나라는 자존심을 넘어 경제적인 부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잉글랜드는 아키텐을 지켜 경제적인 이익을 유지하고 플랑드르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통해 프랑스의 경제에 타격을 주려고 했다. 프랑스는 아키텐을 점령해서 잉글랜드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여 경제적인 이익과 동시에 필리프 6세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동시에 반란이 잦았던 플랑드르를 진압해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잠재우려고 했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는 각자가 가진 경제적인 이익을 지키고 상대가 가진 것을 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富)의 성장에 한계가 있던 시절, 이익을 지키고 더 가지려는 노력은 서로의 타협 없이 이긴 자만이 이룰 수 있는 목표였기에 갈등이 이어졌고 전쟁이라는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의 공작령이던 아키텐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결국 더 가지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갈등은 전쟁의 시작을 유럽에 알리게 된다.
프랑스군은 1337년 4월에 아키텐의 가스코뉴 지방을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다. 이후 두 나라 왕가에 대대손손 후대까지 계속되다가 15세기(1453년)에 들어 잉글랜드에게 젖줄이던 아키텐의 보르도가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약 116년간 이어졌었던 기나긴 전쟁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프랑스 내의 다른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던 잉글랜드였지만 오직 하나 모직물의 수출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칼레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은 잉글랜드의 젖줄을 보르도가 아닌 모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