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8)백년전쟁을 마무리하며

[2024-07-01   02:47]

 

백년전쟁을 마무리하며

세계사의 흐름은 나눠 가지려는 배려보다는 오로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욕구) 때문에 이어지고 있다. 더 많은 금을 가지고자 했던 탐욕이 연금술을 발전시켰듯이 말이다. 겉으로는 왕권의 정당성을 말하거나 복잡한 가계도를 기초로 상속이나 세습을 통한 권리의 주장 또는 지역민의 자유와 해방을 말하지만 거의 모든 것은 거창하게 포장된 거짓일 뿐이다. 지배층은 부(富)에 대한 끊임없는 탐닉을 위해 주변 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땅따먹기를 계속했다.

승리한 세력이 전리품으로 차지한 토지에는 사람이 거주했고 그들은 토지를 경작해 수확물을 만들어냈다. 즉, 전쟁으로 땅을 점령한다는 것은 곧 세금을 추가로 확보하는 일이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인두세와 토지세는 중세의 여러 왕조를 지탱해주는 기본 틀이었다. 여러 왕조가 세력을 유지하고 더 많은 정복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세금이 필요했다. 세금을 꾸준히 걷을 수 있는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또 이들을 정착시키고 경작 활동을 하도록 만들어 수확물을 생산해낼 토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땅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했고 패배한 자는 땅을 조금이라도 덜 잃으려고 애를 썼다. 근본적인 이유는 달라졌으나 전쟁의 승리를 포함해 여러 나라가 조약까지 동원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더 넓은 토지와 바다를 가지려는 탐욕의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만, 땅을 잃고도 승리한 경우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땅을 얻고서도 패배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다. 이것이 바로 부(富)의 갈림길이다. 역사적인 사건 중에서 많은 이들이 잉글랜드의 패배와 프랑스의 승리라고 말하는 백년전쟁도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루한 다툼을 이어가던 전쟁에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영토를 모두 포기하고 떠나게 된다. 얼핏 보기에는 많은 토지를 빼앗긴 잉글랜드가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보인다. 또 토지를 얻어 영토를 확장한 프랑스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당시의 평가라면 맞다. 그러나 훗날에 이어지는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본다면 전혀 다른 해석에 이르게 된다.

백년전쟁 이후 두 나라 모두 혼란을 겪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 세력을 모두 쫓아내고 많은 영토를 확보했으나 오랜 시간 피폐해져 버린 영토를 복구하고 농업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반면 잉글랜드는 모직을 생산하면서 산업을 성장시켰고 부를 모아 자본을 형성시켰다. 이는 자본의 집중으로 만든 동인도회사와 영란은행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길을 다르게 만든 가장 큰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인재(人才)였다.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한 것은 가까웠던 것도 여러 이유 중의 하나였겠으나 그들에게 있어 젖줄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당시 일반적인 농경 제도였던 삼포제를 시행하면서 휴경지에 소와 말이나 돼지를 기르던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양을 많이 키웠다. 양을 키우며 생산되는 양모를 플랑드르에 수출했는데 플랑드르의 기술자들은 양모를 가지고 모직을 만들어 이를 한자동맹을 통해 북유럽과 동유럽 등 여러 지역에 판매하여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이런 특수한 관계로 플랑드르는 지역적으로는 프랑스에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잉글랜드에 예속되어있던 곳이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곳으로 정치적인 봉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잦은 편이었다.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에게 잉글랜드와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가지고 있던 기술을 꾸준히 활용하여 모직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료를 확보하는데 유리한 잉글랜드로 이주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훗날 잉글랜드에 상공업이 프랑스보다 빠르게 정착하는 것은 물론 도시화를 가속하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양모라는 원료의 수출로 얻는 이윤도 작지 않았지만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이 유입되면서 원료를 이용한 제품생산은 물론 판매까지 모두 잉글랜드에서 진행할 수 있다 보니 잉글랜드의 수출이익은 더욱 커졌다. 모직생산이라는 새로운 산업으로 인한 일자리까지 늘어나면서 잉글랜드는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었던 유랑민 문제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에 따른 조세수입까지 늘어나면서 잉글랜드에게 백년전쟁의 후폭풍은 여러모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모직 산업이 성장하고 많은 이익을 내자 제품을 실은 무역선의 안전이 중요해졌고 자연스럽게 이들을 해적으로부터 지킬 상비군이 필요했다.

해군을 중심으로 하는 상비군의 두고 안전한 해상교역이 보장되자 잉글랜드의 모직 산업은 더욱 성장하였다. 모직을 팔아서 남는 이익이 커지면서 어느새 자본으로 성장했고 자본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본력이 생겨 경제라는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후에도 잉글랜드는 여러 형태의 금융 기법의 도움까지 받으며 계속 성장했다. 이런 성장은 계속 이어져 산업혁명이라는 불꽃으로 지구를 밝힌다. 결국 브리튼 섬을 넘어 전 지구에서 존재하는 인구의 1/4를 지배했고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의 1/4을 차지했던 대영제국을 건설한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프랑스 절대왕정의 대표인 루이 14세가 콜베르를 재무장관에 기용하는 1665년이 되기 전까지 농업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비해 상공업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물론 프랑스도 잉글랜드에 못지않은 오랜 시간 경쟁하며 세계사에 굵직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백년전쟁으로 확보한 프랑스의 영토는 오늘날 프랑스가 성공한 농업국가로 알려지는 데 지대한 공이 있다.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프랑스를 만들었다. 꾸준한 발전과 성장을 이루어 지금의 국력은 잉글랜드와 함께 전 세계 Top10에 속한다. 오랜 시간 잉글랜드와 경쟁을 통해 이뤄낸 성과다.

잉글랜드는 귀족 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장미전쟁’과 마그나카르타를 비롯해 여러 정치적인 고비를 넘기면서 정치적인 안정과 함께 경제적인 성장을 이뤄갔다. 잉글랜드는 대서양 너머의 신대륙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여 많은 이익을 누렸다. 동인도회사를 활용해 인도를 통해 아시아로의 진출을 통해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태평양과 오세아니아까지 아우르는 대영제국을 건설하는데 기초를 닦았다. 거기에 산업혁명이라는 세계역사에 굵직한 장면을 연출하며 지구와 인류의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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