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15:39]
백년전쟁의 승자는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4
–경제적인 제재부터 시작한 전쟁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고민하던 중 경제적인 타격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약한 고리를 찾게 된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바로 ‘플랑드르’지역이었다. 당시 유럽의 겨울은 지금의 유럽보다 훨씬 추웠다. 이런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겨울을 따뜻하게 해줄 옷감이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이런 역할을 모직이라는 옷감이 했다. 플랑드르는 추운 유럽의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데 필수품이었던 모직을 유럽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었다. 무겁기는 해도 품질이 뛰어났던 플랑드르의 모직은 유럽에서 중요한 물자였고 그만큼 프랑스도 모직을 생산하고 거래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겼다. 다른 나라로 수출까지 했던 품목이었기에 프랑스에게는 플랑드르가 경제적으로 부(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플랑드르가 모직을 만들어서 많은 이익을 낸다는 것은 유럽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는 이점에 착안하고 플랑드르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는 만큼 필리프 6세와 프랑스에게 상당한 치명타일 거라고 생각했다.
방법을 알아도 수단이 없다면 피해를 줄 수 없기에 방법을 안다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3세는 어떻게 플랑드르에 경제적인 충격을 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양모(羊毛)였다. 삼포식농업을 하던 중세에, 대륙에 있던 다른 나라는 농업을 위해 목축지와 휴경지에 소나 말을 키웠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양(洋)을 키웠다. 이런 이유로 양모(羊毛)를 유럽에서 가장 많이 생산했던 곳이 바로 잉글랜드였다. 모직을 생산하는 기술은 플랑드르에 있었으나 모직의 원료였던 양모는 잉글랜드에서 생산된 것을 수입해서 사용했던 거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유럽 최대의 양모 생산지인 잉글랜드의 원료와 유럽 최대의 모직 생산지인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가 서로에게 순기능을 하는 거대한 ‘모직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었다. 생산된 모직은 한자동맹을 통해 북유럽과 동유럽 등 겨울이 추운 곳에 옷감을 공급하였다.
즉, 플랑드르가 모직을 생산해서 생계를 넘어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잉글랜드에서 저렴하게 양모 공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에서 공급되던 양모는 플랑드르까지 지형적인 요인으로 인해 이동 거리가 짧으면서도 배로 운송하다 보니 육지에서 운송하는 것보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공급받는 양모는 운송 거리와 운송량에서 다른 지역의 양모를 공급받는 것보다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는 핵심 요인이었다. 이는 가격을 저렴하게 유지하면서도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또는 가격을 올리는 만큼 이익도 증가하는 선순환구조를 갖도록 했다.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의 지형적 요인은 모직생산에 있어서 만큼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절대 값으로 작용했다.
이런 이유로 플랑드르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경제적으로는 잉글랜드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잉글랜드에서 플랑드르로 보내는 양모의 양이 엄청났기 때문에 갑자기 공급을 중단하면 이를 대체할만한 공급처를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운송비가 늘어 원재료비의 상승으로 생산되는 모직 가격을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한다면 이익률을 낮추어야 했다. 또는 모직의 값을 올려 원가 부담을 소비자 가격에 이전을 해야했는데 이는 가격상승으로 이어져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직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게 당연했다. 이런 점이 프랑스와 필리프 6세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잉글랜드와 에드워드 3세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플랑드르는 경제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풍요롭다 보니 권위적이었던 필리프 4세 때부터 갖은 핍박과 수탈을 당했던 과거가 있었다. 국가개념이 약했던 중세였기에 수탈로 인해 플랑드르지역의 여러 도시 일반시민들은 프랑스 왕국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가 양모를 수출하지 않으면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게 될 플랑드르의 상공인들로 인해 민심이 필리프 6세와 멀어질 거라는 기대까지 곁들였다.
결국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의 프랑스에 경제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양모를 플랑드르에 수출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1336년 8월에 양모의 수출 금지령을 내린다. 이런 소식은 프랑스로 전해졌다. 필리프 6세보다 더 놀란 것은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이었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일이 실제로 발생하자 플랑드르의 시민들은 프랑스에 대해 오랜 시간 누적되었던 불만이 반감으로 변했다. 결국 고래 싸움에 새우의 등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로 일터와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플랑드르 시민들의 여론은 프랑스 왕국을 버리고 잉글랜드왕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은 모직을 만들고 거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더불어 모직을 거래하기 위해 찾아오는 다른 지역과 다른 나라의 상인들로 인해 플랑드르는 식당과 숙박업도 성장했다. 이를 통해 많은 이익을 내며 부유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바탕에 모직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는데 잉글랜드가 양모를 수출하지 않으면 많은 양의 양모를 구할 곳이 없게 되면 플랑드르에서는 더 이상 모직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내용을 알고있는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발생한 잉글랜드의 조치에 생계에 위협을 느꼈다. 식당과 숙박업은 물론 모직을 운반하는 해운업과 운송업까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한 플랑드르의 상공인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대책을 세우려고 머리를 맞댔으나 플랑드르의 백작인 루이 1세는 플랑드르지역의 위기 상황에 아랑곳없이 지난날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필리프 6세에 대한 충성만을 강조했다. 동시에 플랑드르에서 걷히는 막대한 액수의 세금으로 파리에 주로 머물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암담한 상황을 맞은 플랑드르의 시민들의 위기의식이 커질 수록 수탈을 일삼는 플랑드르 백작인 루이 1세와 그가 충성하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져갔다. 플랑드르에서는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의 편에 서야 한다는 여론이 점점 강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친프랑스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민이 체포되면서 많은 이들이 자극을 받았다. 더 이상의 핍박과 통제를 간과할 수 없었던 플랑드르에서는 야코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