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 11:31]
–백년전쟁이 남긴 변화
두 나라가 많은 자원을 소모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군을 쫓아낸 프랑스의 승리로 기록되고 마무리가 된다. 다만 이후의 움직임을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금은 다른 길을 걷는다. 프랑스는 오랜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토를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잉글랜드는 좀 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백년전쟁을 종전한 후에 장미전쟁이라는 내란이 있었으나 정치적인 안정기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대로 이어왔던 프랑스에 있던 봉토인 아키텐을 잃게 되었으나 프랑스와 대적하며 잉글랜드라는 나라의 역량을 유럽에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치러진 많은 전투에서 기사와 귀족의 희생이 많았다. 이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몇몇 가문의 봉토가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 동시에 이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봉건적인 질서가 무너졌다. 두 나라 모두 지역색이 사라지면서 민족이라는 의식과 국가라는 개념이 성장하면서 중앙집권 국가로의 전개가 이어진다.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국왕의 권력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그로 인해 프랑스의 경우 여러 지역이 왕의 직할지로 바뀌면서 왕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이 경제적으로 귀족보다 부유해지면서 귀족들의 왕에 대한 충성도도 강해졌다. 이는 왕권이 강화되는데 영향을 주어 근대유럽의 상징으로 알려진 프랑스 절대왕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전쟁이 길어지자 환경이 바뀌면서 흥미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전쟁터가 된 프랑스를 떠나 플랑드르의 모직업자와 무역업 종사자들이 상업이 발달한 주변의 네덜란드나 신성로마제국의 북부에 있던 뤼베크, 모직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양모공급지인 잉글랜드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플랑드르의 모직 기술자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할 수 있도록 꾸준히 장려했었다. 이주한 기술자들이 통해 모직을 생산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 잉글랜드인들이 모직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도록 장려했다. 이후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오랜 시간 전투가 이어지며 프랑스 왕실과 귀족의 탄압까지 계속되면서 이주자는 점점 더 증가했다. 플랑드르의 상공인들 입장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으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불안을 유지하는 플랑드르보다는 전쟁의 위협이 적어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잉글랜드가 훨씬 나았다. 이는 잉글랜드의 상공업에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로의 이주는 경제적으로 유리한 결정이었고 많은 실리를 안겨주었다. 모직의 가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양모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송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또 바다를 건너야 했기에 날씨에 영향을 받던 플랑드르에서와는 달리 양모의 공급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어 모직을 생산하는 데 유리했다. 동시에 플랑드르의 기술과 자본이 원자재를 따라 잉글랜드로 옮겨오면서 생산의 원스톱 공정이 완성되었고 잉글랜드는 원료 수출국에서 제품 수출국으로 위상이 바뀐다. 이는 잉글랜드가 양모를 수출하며 얻었던 이익 외에도 모직을 직접 생산하며 부가가치라는 것을 확보했다는 걸 의미한다. 자본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 거다. 생산된 모직은 상인들을 통해 무역 거래까지 체결시키면서 중간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규모를 더욱 키우는 산업으로 성장한다.
잉글랜드가 모직 제품을 생산하면서 양모의 공급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양모를 공급하고 있었다. 모직 생산지였던 플랑드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은 잉글랜드의 양모가 부의 원천이었다. 잉글랜드에서 전쟁이 개시되던 무렵부터 모직의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 양모의 수출량은 계속 감소했다. 모직을 생산하느라 양모를 잉글랜드 국내에서 계속 소비했기 때문이다. 이는 양모의 공급 가격 상승을 가져왔다. 유럽의 양모 수요를 공급하던 잉글랜드에서 공급량이 줄자 양모 공급 가격이 올라 생산된 모직의 제품가격도 자연스럽게 오르게 되었다. 이런 환경은 잉글랜드에게 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주었고 양모를 생산하기 위해 양을 키우는 곳이 늘어나면서 훗날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든다. 백년전쟁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년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프랑스의 국토에서는 전쟁이 있었으나 잉글랜드에서는 잉글랜드를 개조하는 작업이 있었던 거다.
전쟁으로 인해 부각되지 않았을 뿐 잉글랜드는 원료를 수출만 하던 후진적인 무역 국가에서 제품을 제조해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수출하는 선진적인 무역 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로 습득한 경험은 훗날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거듭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잉글랜드는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게 아니라 경제도약의 동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익을 키워 자본이라는 영역으로 확장을 통해 잉글랜드는 계속 성장하였다. 이후 자본은 더욱 커져 영란은행의 설립과 잉글랜드의 역사를 바꾸는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지게 된다.
더불어 두 나라 모두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잉글랜드에서는 젠트리 계층이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로 가기 위한 바탕이 마련된 거다. 이후에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시기적인 차이만 있을 뿐 정치‧경제‧외교‧사회‧문화‧과학 등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서로를 견제와 경쟁을 하며 성장했다. 식민지를 건설하면서도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 인도차이나, 중국 등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협력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등 현대사의 곳곳에서 굵직한 장면을 서로 협력하며 만들어냈다. 그로 인해 두 나라 모두 유럽은 물론 세계의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