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4 23:23]
로컬과 토종
전 세계를 휩쓴 한국 영화가 있었다. 바로 ‘기생충’이다.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2019년에만 69곳의 영화제와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2020년 이후에도 아카데미를 비롯해 52곳의 영화제와 협회 시상식에서 수상하였다. 이런 인기를 누리던 2019년 10월 ‘벌처’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국 영화가 오스카(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지 않은 이유가 뭐라 생각하냐?’는 질문에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매우 ‘로컬’(지역적)이니까.(“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라고 답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현지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받았던 발언에서 ‘로컬’은 도드라졌었다.
그렇다. 로컬이라는 단어는 한정된 지역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지역경제를 말하며 사용되는 로컬이 가진 의미는 ‘역내 생산’과 ‘역내 소비’라는 개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하루에도 서울과 부산을 한두 번 왕복하는 게 가능해진 오늘날의 교통상황과는 로컬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지역을 벗어나는 소비가 일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로컬이 부각되는 이유는 바로 지역의 인구감소로 인해 소비가 감소하면서 지역경제가 침체되는 것을 막고 활성화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은 상업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조선시대에서 보기 쉬운 장면이었다. 조선에서는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로컬이 활성화되었던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려고한다.
지역 현지의 공장이나 농장에서 생산한 제품 또는 제공되는 서비스가 현지에서 소비되는 것을 말하는 로컬은 교통이 편리해진 오늘날에 쉽지않은 경우다. 교통 발달이 어려웠던 시기인 조선에서는 어떤 형태로 로컬이 이루어졌었을까? 조선에서 지역의 자급자족이 당연한 것이었다.
연안 바다와 강을 중심으로 수운을 이용해 대량의 화물을 먼 거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역할을 했던 조운선은 해상운송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육상은 그와 달리 비교적 짧은 거리를 이동하거나 적은 수량을 운송할 때 사용되었다. 이때에는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곡식이나 도자기 같은 물자는 거의 강과 연안 바다를 이용하는 수운이 중심이었다. 단, 성을 새롭게 세우는 축성을 하거나 수리를 할 때, 집을 짓는 것을 비롯한 각종 건축행위를 할 때 필요했던 돌과 흙이나 나무, 기와 벽돌 등의 자재를 나르려고 사람보다는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를 ‘우마차’라 해서 주로 사용하였다. 즉, 거리적으로 가깝거나 지엽적인 운송에서는 사람보다는 효율적이었던 수레를 사용했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산악지형이 많은 북부지역보다는 평지가 많아 가축을 이동시키기에 용이한 남부지역에서 수레를 사용하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조선시대까지 이런 모습이 일상이었다.
조선에서는 화폐를 따로 만들어 통용하지 않고 마포나 면포와 같은 옷감을 화폐로 사용했었는데 이를 포화라고 한다. 조선은 중앙정부가 필요로 하는 포화나 쌀을 포함한 곡식이 한성으로 운반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외에 나머지에 대해서는 각 지역이 필요한 물자를 생산해서 사용하도록 경제적인 구조를 구성하였다. 중앙에서 각 지역으로 농사기법과 종이 만드는 기술, 광석을 제련하거나 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은 주요 기술을 보급해 주었고 관청에서는 이런 기술을 익힐 사람을 뽑아 기술자를 양성하여 필요한 물자를 만들어 자체 조달하기도 했다.
또 군 조직에 필요한 대포와 화약 같은 물자를 만드는 기술을 각 병영에 전했다. 각 지역에서 필요한 대포와 화약은 물론 수군의 경우 군선까지 자체 제작하여 훈련에 사용하도록 했다. 동시에 보급이 어려운 지역의 경우 군둔(軍屯)이라고 불리는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농사에 투입시켰다. 평시에는 둔전에서 농사를 지어 군량을 확보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다시 군대에 복귀하여 전투에 투입하였다.
이렇듯 조선에서의 로컬은 자급자족하면서 지역경제를 유지하고 지역의 방어까지 이뤄져야 되는 전략적인 방향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의 로컬이 추구하는 방향성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알아서 생산을 하고 알아서 소비하고 교육까지 자체적으로 이어지다보니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