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9]
혁명의 불꽃으로 타오른 녹두 꽃에 영혼 가득한 죽력 한 모금
매년 12월 31일이면 수많은 조명시설과 방송 장비가 모이는 곳이 있다. 뿐만아니라 평소에도붐비는 이곳은 추운 연말임에도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바로 종각이다. 조선의 국교인 유교에서는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오상이라고 한다. 이 오상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연동하여 방향을 잡고 각 방향에 있는 사대문의 이름에 넣어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고 했다. 또 사대문의 중앙에는 때마다 시간을 알리는 종을 배치했는데 그곳의 이름을 지을 때 오상의 마지막 개념인 신(信)을 넣어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했다.
핸드폰과 시계가 일상화된 우리의 세대에서 보신각에 설치된 종은 그 역할을 멈추게 되었지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타종식을 거행하면서 그 상징성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조선 시대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종이 있는 각이라고 해서 종각이라고 불렀다. 종각 앞에 길에 있다고 해서 종로로 불리다가 시간이 흘러 그곳에 지하철이 생겼는데 이름을 그대로 적용해서 종각역이라고 한다. 보신각 주변에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높은 건물들이 많아 역사성은 줄었다. 그러던 중 혁명을 이끌다가 전옥서 터에서 순국한 지 123년이 되는 2018년 4월에 하나의 동상이 새롭게 자리를 잡으며 역사의 현장임을 알리게 되었다. 바로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다. 양반다리로 앉아 오른쪽을 응시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은 탐관오리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봉기했던 전봉준 장군의 결기가 가득한 눈빛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지방의 한낱 서생으로 살던 그가 혁명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단초를 만든 것이 바로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조병갑의 폭정이 전봉준의 아버지를 상하게 했고 이에 민심이 동요를 일으키며 전봉준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동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전봉준은 각 지역의 접주들과 힘을 합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그 기세가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감영(도지사 역할을 하던 관찰사가 머물던 곳, 지금의 도청소재지)이 있던 전주성을 함락할 정도였다. 이후에 일제의 침략으로 간섭이 심해지자 이를 몰아내고자 일어섰던 2차 봉기에서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때 고문으로 다리를 크게 다쳐 고생하고 있었다. 한성으로 압송되면서도 걷거나 이동을 하기가 어려워 가마에 실려가는 사진이 기록으로 남은 이유다. 이때 다친 다리의 부상을 이겨내기 위해 치료제로 사용된 약이 바로 ‘죽력고’라고 불리는 술이다.
대나무 기름이라고도 불리는 죽력은 대나무를 불에 구워서 나오는 진액인 죽력을 모아 소주와 함께 숙성시켜서 만든 약술이다. 한의학에서는 죽력을 주로 중풍으로 인해 발생한 언어 장애나 열로 인해 발생하는 번뇌나 혼미한 정신 등을 다스리는데 사용하였다. 더불어 중추신경계와 혈압치료에도 사용되는 등 쓰임새가 다양한 약재로 알려졌다. 이런 죽력을 넣어 숙성시킨 죽력고를 마시면서 서울까지 압송된 전봉준은 모진 고문으로 떨어진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한성으로 압송되는 동안 회복된 기력은 곧 사라졌다. 한성에서 또 다시 시작된 조사에서 흥선대원군과의 연루된 정황을 캐내려던 조사관들에 의해서 모진 고문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겪은 전봉준의 고초는 엄청났다.
더 이상 밝혀낼 것이 없자 그동안의 죄상을 물어 전봉준은 그가 있었던 전옥서의 터에서 사형을 당하게 된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죽력고를 마시고 싶다는 그의 소원대로 죽력고를 한 잔을 마신 그는 먼 산을 응시하며 형을 받게 되었다.
정치가 썩어 백성을 핍박하며 풍요를 누리던 기득권의 방임을 처단하고자 봉기를 일으키며 민심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정에 알렸던 그는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위해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으나 그 뜻을 펴보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 이후 일본의 침략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더욱 감시가 심해져 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고 이후 조용히 삶을 마감하게 된다. 동학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고 활동을 했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혁명의 정신 때문이었는지 일제의 병탄 이후에 수많은 천도교 출신의 광복투사들이 나와 일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나라에 대한 걱정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 죽력고에 전봉준의 숨결은 아직도 살아있다.
위정자들의 핍박은 그때 이후에도 수차례의 봉기를 일으켰다. 단지 예전만큼의 폭력성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사익만을 추구하는 정치는 그러나 그만큼 국민의 고통을 수반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인이 가는 길에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도 죽력고의 쓰임에 값어치가 있다고 하겠다.